인간은 뛰어난 감각 기관을 지닌 동물이다. 후각은 개보다 떨어지고 시각은 독수리만큼 좋지 않을지 모르지만, 사실 모든 형태의 정보를 수집해 종합적으로 처리하는 능력에서 인간을 따라올 동물은 별로 없다. 예를 들어 인간은 정교한 청각을 이용해 수많은 단어를 인지하고 정보를 처리한 후 다시 자신의 의견을 언어라는 복잡한 소리를 표현할 수 있다.
하지만 복잡한 뇌와 잘 발달된 귀가 없는 동물에서도 소리를 듣는 능력은 생존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심지어 귀가 없는 동물도 천적의 소리에 민감하게 반응해 생존을 도모한다. 13일 학계에 따르면 미국 빙햄턴대의 캐롤 마일스 연구팀은 귀가 없지만 천적인 말벌의 날개 소리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박각시나방’ 애벌레의 청각을 연구했다.
인간의 귀는 외이, 중이, 내이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각 외부의 소리를 효과적으로 모은 후 진동을 크게 중폭하고 파장을 인식해 뇌로 전달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복잡한 기관이다. 하지만 작은 애벌레 입장에서 이런 고도로 발달된 귀를 지닐 수도 없고 설령 있다고 해도 여기서 들어올 정보를 처리할 큰 뇌도 없다.
하지만 이런 경우에도 애벌레들은 소리에 반응할 수 있다. 바로 잎이나 줄기를 타고 들어오는 진동을 다리와 몸통으로 느끼는 방식이다. 그런데 마일스 교수는 박각시나방 애벌레들이 생각보다 뛰어난 청각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애벌레들은 마일스 교수가 단순히 ‘부’(boo) 소리만 들어도 깜짝 놀라 자리에서 튀어 올랐다.
연구팀은 애벌레가 귀가 없어도 특정 소리를 잘 듣는 비결에 대해 두 가지 가설을 세웠다. 첫 번째는 애벌레가 단순히 잎과 줄기에 전해지는 진동을 몸통으로 느낀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몸에 난 미세한 털(감각모)의 진동을 감지한다는 것이다. 이를 검증하기 위해 연구팀은 세계에서 가장 조용한 실험실인 빙햄턴 대학의 무반사실(anechoic chamber)을 이용해 정밀한 소리 실험을 진행했다.
무반사실에서 실험을 진행하는 과학자들. Greg Schuter
이 방에서는 소리와 진동을 독립적으로 조절할 수 있어, 애벌레가 어떤 자극에 반응하는지를 정확히 측정할 수 있다. 연구팀은 150Hz(저주파)와 2000Hz(고주파)의 소리를 재생하고, 애벌레가 표면 진동과 공기 중 소리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비교했다.
그 결과 애벌레는 발로 느끼는 표면 진동보다 공기 중 소리에 10~100배 더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으로 확인됐다. 연구팀은 두 번째 가설을 확실히 검증하기 위해 애벌레의 복부와 가슴 부위에 있는 미세한 털을 제거했다. 그 결과 애벌레의 소리 감지 능력이 크게 떨어졌는데, 이는 소리를 감지하는 데 이 미세한 털이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는 확실한 증거다.
연구 결과를 종합하면 애벌레는 진화 과정에서 포식자인 말벌의 날갯짓 소리(약 100~200Hz)를 감지할 수 있도록 발달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털을 이용해 공기 중 진동을 감지하는 수준으로는 사람처럼 언어를 이해하거나 음악을 감상할 순 없다. 하지만 천적의 접근을 1초라도 빨리 인지하고 나뭇잎에서 뛰어내리면 생존 가능성을 크게 높일 순 있다.
우리 눈에는 하찮게 보일 수 있는 작은 애벌레와 그 애벌레에 난 털이지만, 사실 이런 단순한 방식으로도 소리를 듣고 환경에 맞게 반응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인간의 언어 능력만큼이나 놀라운 생물의 적응력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