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인신매매 결합한 신종 사기단…CNN “여성들 감금·착취”
윤태희 기자
입력 2025 11 26 14:31
수정 2025 11 26 14:31
고객센터 일자리” 속여 여성들 미얀마·캄보디아로 유인…AI 기술까지 동원한 범죄 조직
필리핀 마닐라 북쪽 마을에서 조카들을 돌보고 있는 고모 로즈. 그의 동생 릴리는 올해 초 ‘고객센터 일자리’ 제안을 믿고 출국했다가 사기단에 인신매매돼 감금·폭행을 당했다. 출처=CNN
필리핀 마닐라 북쪽의 한 마을. 작은 편의점을 지키는 세 살배기 소년은 엄마가 그리워 매일 같이 “언제 집에 오냐”고 묻는다. 엄마 릴리(가명)는 지난 4월 ‘대만 고객 서비스직’을 믿고 출국했지만 실제로는 미얀마에 있는 사기 조직에 팔려가 감금과 폭행을 겪었다.
릴리는 가족에게 보낸 메시지에서 여러 차례 “여기서 죽고 싶다”고 호소했다. 고모 로즈(가명)는 25일 공개된 CNN 인터뷰에서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아이가 불쌍해 숨이 막힌다”고 전했다.
‘고객센터 일자리’라더니…지옥으로 끌려간 여성들
필리핀 북부의 한 폐쇄된 사기단 본거지 내부. 이곳에는 한때 5000명이 넘는 인신매매 피해자들이 감금돼 강제로 사기 행각에 동원됐다고 CNN은 전했다. 출처=CNN
CNN은 이날 “수개월간의 조사 결과 아시아 전역에서 수십만 명이 사기 산업에 끌려가고 있다”고 보도했다. 피해자 상당수는 여성들로 필리핀, 태국, 미얀마뿐 아니라 아프리카와 유럽 출신도 포함됐다.
사기 조직은 여성의 얼굴과 목소리를 악용해 온라인 연애나 투자 사기를 벌였고 지시를 따르지 않으면 폭행과 성폭력을 가했다.
캄보디아의 한 사기단 본거지에서 강제로 전화 사기에 동원됐다가 구조된 필리핀 여성 카시(가명). 그는 여전히 빚과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다. 출처=CNN
필리핀 여성 카시(가명)는 ‘홍콩 고객센터’ 구인 광고를 믿고 출국했다가 캄보디아에서 전화 금융사기를 강요받았다. 그는 CNN에 “거짓말을 할 때마다 벌로 서 있게 하거나 밥을 주지 않았다”며 “6만 페소(약 150만 원)에 사람을 사고파는 글을 보고 탈출을 결심했다”고 밝혔다.
필리핀 대사관은 지난 4월 카시를 구조했지만 그는 여전히 빚과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다.
가족은 파탄…“정부는 언제까지 기다릴 건가”
사기단에 감금된 여성들의 가족들이 하나코 몽고메리 CNN 기자(오른쪽 두 번째)에게 구조 활동의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다. 왼쪽 세 번째 인물은 여섯 손녀를 돌보는 할머니 샬럿. 출처=CNN
여성들이 끌려가면서 가족의 생계도 무너졌다. 여섯 손녀를 돌보는 할머니 샬럿(가명)은 “전기도 물도 끊길 지경”이라며 “정부는 누가 죽어야 움직이느냐”고 호소했다.
다니엘레 마르케시 유엔마약범죄사무소(UNODC) 필리핀 담당관은 CNN에 “여성들이 사기 실적을 채우지 못하면 성노예로 전환되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중국 범죄조직의 10조 원대 사기 산업
필리핀 북부에 위치한 대규모 사기단 본거지 전경. 근로자들이 갇혀 일하던 사무실과 기숙사 옆에는 보스가 거주하던 호화 빌라와 수영장이 함께 있었다. 출처=CNN
필리핀 북부에서 적발된 사기단 본거지의 내부 사무실. 한때 이곳에서는 온라인 연애와 투자 사기를 벌이던 근로자 수천 명이 감금돼 피해자들을 속이도록 강요받았다. 출처=CNN
필리핀 북부의 사기단 기숙사 내부. 피해자들은 이곳에 감금된 채 온라인을 통해 피해자들을 속이는 범죄 행위에 동원됐다. 출처=CNN
CNN은 필리핀 북부의 폐쇄된 사기단 본거지를 직접 취재했다. 10헥타르(3만 평) 규모의 부지에는 컴퓨터 수백 대, 유심(SIM) 카드 수천 장, 그리고 피해자들에게 사기를 강요하기 위해 사용된 사기 대본집이 남아 있었다.
사기단 보스의 거주 공간 내부. 화려한 실내장식과 고급 가구가 즐비해 근로자들이 생활하던 열악한 기숙사와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출처=CNN
필리핀 당국은 이곳의 주범이 중국계 범죄조직 보스 황즈양이라고 밝히고 인신매매 혐의로 체포영장을 발부했다.
현지 당국은 이 사기단이 수십억 달러(약 10조 원) 규모의 자금이 오가는 불법 산업으로 성장했다고 밝혔다. 이 사기단은 도박 사이트 ‘POGO’를 위장해 운영했으며 로드리고 두테르테 전 정부 시절 외국인 투자 기업으로 인정받았다.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정부는 대대적인 단속에 나섰지만 일부 지방 공무원이 연루된 정황이 드러났다고 CNN은 전했다.
“AI 가면 쓰고 사랑을 팔았다”…‘가짜 연인’의 실체
하나코 몽고메리 CNN 기자가 범죄 조직이 얼굴을 바꿔 피해자를 속이는 방식으로 사용하는 AI 얼굴 필터 기술을 시연하고 있다. 출처=CNN
사기단은 최신 인공지능(AI) 기술을 동원했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 여성 사라(가명)는 “AI 얼굴·음성 필터를 이용해 ‘린다’나 ‘제니’라는 아시아 여성으로 변신해 영상통화를 했다”고 증언했다.
그는 “잠도 못 자고 고문을 당하면서 대사를 외워야 했다”며 “지옥 같았다”고 밝혔다. 또 “조직원들이 말을 듣지 않거나 반항하면 ‘성노예로 만들어버릴까’라며 협박했다”며 “그게 우리가 가장 두려워하는 일이었다”고 덧붙였다.
사라는 9개월 만에 탈출했지만 다른 여성들은 여전히 감금돼 있다고 CNN은 전했다.
“아직도 지옥에 있다”…남겨진 목소리릴리는 결국 이달 귀국해 두 아들과 재회했지만 수개월간의 악몽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CNN은 “아이들은 여전히 엄마의 품에서 악몽을 꾸고 있다”며 “그녀는 이제 가족의 생계를 다시 일으켜야 한다”고 전했다.
윤태희 기자


























